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로널드 레이건/평가 (문단 편집) === 부정적 평가 === 당시 소련 공산당 서기장이였던 [[미하일 고르바초프]]는 미국의 스타워즈 계획을 뚫기 위해 들어가는 비용은 미국의 스타워즈([[SDI]]) 계획에 들어가는 비용의 단 10분의 1이면 충분하다는 결론을 얻었을 정도로 [[미군]]의 군비 지출은 낭비적인 측면이 컸다. 미국내에서는 이를 영화배우를 대통령으로 뽑은 결과라는 자조적인 평가도 나온다. 한마디로 쇼에 능했지 디테일에 충실하진 않았다는 것. 그리고 확실히 소련은 군비경쟁 때문에 무너진 게 아니라 고르바초프의 성급한 개혁이 실패하며 무너진 것이라는 견해가 인류사학적으로 합당한 평가를 받고 있다. 다만 이것 말고도 냉전사학계에서 냉전의 붕괴의 이유에 대해서는 여러가지 소수의견들이 뜨겁게 오가기 때문에 본인 스스로 연구를 해보는걸 추천한다. 어찌 되었든 레이건 시대의 군비 확장은 이미 지미 카터 때부터 시작되어 왔던 것으로, 군비 예산 증가율은 두 대통령의 재임기간 동안 거의 비슷했다. 다만 레이건은 카터 때보다 실속이 없었다는 평가를 받지만 말이다. 이렇게 치솟던 군비 지출은 후임인 조지 H. W. 부시 대에 이르러 정리되기 시작한다.[* 특히 (더 이상 필요가 없게 된 급속전략타격자산들을 중심으로) 육군이 많이 잘려나갔다. 해군은 처음부터 실현 가능성이 낮았던 프로젝트 몇 개 날아간 것 빼고는 타격이 없었다.] 또한 [[니카라과]]의 [[콘트라]] 반군 지원과 이 과정에서 [[이란]]과 커넥션이 있었다는 게 밝혀진 이른바 [[이란-콘트라 사건]]으로 '외교 정책에서 지나치게 강경하고 비인도적이다'라는 욕을 먹었다. 이게 언뜻 보기보다 심각한 이유는 의회가 '콘트라 지원하지 말라'고 법을 통과시켰는데도 이걸 무시하고 행정부가 폭주를 했기 때문. 거기에 레이건은 '이란과 인질을 대가로 무기를 거래한 적이 없다'고 TV 담화를 했는데, 이게 완전한 거짓말이었던 것이 불과 몇 달만에 탄로가 난 것이다. >"몇 달전에 저는 여러분들에게 인질과 무기를 교환한 적이 없다고 했습니다. 제 마음과 선의는 여전히 그것이 진실이라고 말하고 있습니다만, 사실과 증거들은 그게 진실이 아니라는 것을 입증하고 있습니다." 결국 몇 달만에 이런 궁색한 말로 간접적이나마 자신의 책임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이 [[니카라과 사건]]에서 미국은 국제형사재판소에서 제소까지 당해 콘트라반군 지원 및 산디니스타 좌파 정부 전복 시도에 대해 '''국제법 위반'''및 피해배상 판결 배상까지 당하며 국제적 망신을 당하며 명백한 미국의 과오로 결론내려졌다. 그러나 미국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국제형사재판소 판결 불복및 안전보장이사회에서도 거부권을 행사하는 추잡함까지 불사해가며 니콰과라에 미국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보상하는 것을 거부한다. 결국 니카라과는 [[유엔 총회]]에 호소, 94 대 3이라는 압도적 표차로 미국을 규탄했다. 다만 대통령이 직접 지시를 내렸다는 증거는 나오지 않았고 사건의 주범인 올리버 노스 중령이 청문회에 임하는 자세가 대중의 동정을 사는 등 국민 여론이 "탄핵까지 갈 사안은 아니다" 쪽으로 쏠려서 여차저차 마무리되었다. 또한 그 외 성과를 거둔 정부 정책(소련과의 군축 합의라든가)도 결국 카터 시절에 만들어진 거 레이건이 받아먹은 거 아니냐는 비난이 있다. 비슷하게 이란이 억류하고 있던 미 대사관 직원들이 레이건이 취임하자마자 풀려나서 '레이건은 나약한 카터와는 다르다'라는 국민들의 인식을 공고히 해줬는데, 사실 카터 행정부가 자기들이 퇴임하기 직전까지 끈질기게 협상한 결과물을 레이건이 받아먹은게 아니냐는 설도 있다. 이슬람 반군들에 대한 지원을 시작하면서 [[소련-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씨앗을 뿌린 것 역시 퇴임 1년 여 전의 카터 행정부였지만, 레이건은 이 공작을 대폭 확대해서 중동, 아프리카 지역의 공산주의 정권들을 속속 무너뜨리고 흔들어댔다. [[무자헤딘]] 지도자들을 백악관으로 불러 "이들은 우리의 건국의 아버지들과 도덕적으로 대등하다"고 치하한 것이 레이건이고, [[오사마 빈 라덴]]에 대한 미국의 최초 지원의혹이 있는 시점도 레이건 시절. 물론 곰덫(Bear Trap)은 효과적으로 작동해서 [[소련]]을 빈사상태로 만들고 침몰시키지만 레이건 퇴임 후 10여년 뒤에 [[9.11 테러|미국도 그 덫에 걸리고 만다.]] [[1982년]]에 벌어진 [[포클랜드 전쟁]]에서 너무 대놓고 [[영국]]과 [[마가렛 대처]] 편을 들어주었다는 것으로도 비난받았다. 물론 포클랜드 전쟁에서 아르헨티나는 침략자들이고, 영국을 핵심 우방국으로 삼는 미국의 대통령으로서 영국을 편을 드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지만, 이러한 행보와 [[교도소]] 민영화로 인해 [[히스패닉]]들에게는 완전히 [[불구대천]]이 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특히 미국이 있는 아메리카 대륙에서는 과반수가 히스패닉이라는 점을 감안하면 레이건의 이런 행보는 반쯤 자충수인 셈이다. [[1985년]] 4월에 2차대전 유럽 전선 종결 40주년을 맞이해 [[독일|서독]]을 순방하던 중 [[나치]]의 [[슈츠슈타펠|친위대]] 전사자들이 묻혀 있던 비트부르크의 묘지를 방문해 조의를 표한 것 때문에 엄청나게 까였다. 레이건은 '그들은 나치의 끄나풀이기는 했지만, 복잡한 정세 속에서 상황 판단을 못한 희생자에 속한다고 생각한다'고 변론하고 일정 중 베르겐-벨젠 강제수용소 방문을 추가하는 것으로 반발을 무마하려고 했지만, 미국 내 [[홀로코스트]] 생존자들은 물론이고 [[라몬즈]]나 [[프랭크 자파]] 같은 뮤지션들에게도 각각 'My Brain is Hanging Upside Down (Bonzo Goes to Bitburg)', 'Reagan at Bitburg'같은 노래들로 대놓고 [[디스]]당했을 정도. [[1987년]], 레이건은 [[부르키나파소]]의 [[토마 상카라]] 통치 하에 급격한 성장에 위협을 느낀다. 급진적이고 효율적인 정책으로 부르키나파소는 4년만에 농업 생산량이 2배가 증가한다. [[반미]] 사회주의 개혁혁명가라는 사람이 시행한 성공적인 정책으로 국가가 성장하게 된다면 [[제3세계|주변국]] 역시 [[반미주의]]의 영향을 받을 것이라고 판단, [[레이건]]과 [[CIA]]는 상카라의 정적인 [[블레즈 콩파오레]]를 포섭하여 [[쿠데타]]를 사주하였고 결국 콩파오레의 쿠데타 아래 [[명군]]이었던 상카라는 4년이라는 단기간의 집권기를 가진 후 살해당한다. 이후 [[부르키나파소]]는 콩파오레의 근 30년 독재 하에 [[파탄국가]]로 전락, 오히려 상카라 집권 전보다 훨씬 못할 정도로 모든 분야에서 나락으로 굴러떨어져버렸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